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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러시 페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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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러시 페렌츠는 189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군 복무를 거쳐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민족주의 정당을 창당했으나, 과격한 사상으로 인해 활동이 금지되었고, 이후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화살십자당을 이끌며 헝가리를 지배했다. 살러시는 유대인 학살과 전시 동원을 자행했으며, 1945년 미군에 체포되어 헝가리로 송환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통치는 헝가리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로 평가받으며, 극단주의와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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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러시 페렌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4년의 살러시
이름살러시 페렌츠
로마자 표기Szálasi Ferenc
출생일1897년 1월 6일
출생지카샤, 오스트리아-헝가리 (현재 코시체, 슬로바키아)
사망일1946년 3월 12일
사망 장소부다페스트, 헝가리 공화국
사망 원인교수형
배우자기젤라 루츠
직업군인, 정치인
별칭(정보 없음)
군사 경력
소속오스트리아-헝가리군 (1915–1918)
(1920–1935)
복무 기간1915–1935
계급소령
지휘제1 혼베드 혼성 여단
참전제1차 세계 대전
훈장3급 철왕관 훈장
정치 경력
소속 정당화살십자당
칭호국민 지도자
임기 시작1944년 11월 4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7일
전임미클로시 호르티
(헝가리 섭정)
후임고위 국가 평의회
(집단 국가원수)
직책헝가리 총리
임기 시작1944년 10월 16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7일
전임게저 라카토시
후임벨라 미클로시

2. 생애

살러시 페렌츠는 1897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커서(Kassa, 현재 슬로바키아 코시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으로 참전했으며, 전쟁 후에는 헝가리군에서 복무했다. 1930년에는 인종차별주의 성향의 비밀 결사인 헝가리 생활 동맹(Magyar Élet Szövetség)에 가입하여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35년 군에서 은퇴한 뒤,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의지당(Nemzet Akaratanak Pártja)을 창설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39년 나치즘의 영향을 받은 화살십자당(Nyilaskeresztes Párt)을 설립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반정부 활동 혐의로 투옥되었다. 1940년 나치 독일히틀러의 압력으로 석방되어 독일로 망명했다.

1944년 3월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귀국하였고, 같은 해 8월부터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준비했다. 1944년 10월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국민 지도자(Nemzetvezető)임을 선언하고, 국민단결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그의 정권은 나치 독일에 철저히 협력했으며,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화살십자당 당원들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다.

1945년 3월, 그의 정부는 연합군에 의해 무너졌다. 살러시는 같은 해 5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미군에 투항했고, 이후 헝가리로 압송되었다. 헝가리 인민재판소에서 전범으로 재판받아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3월 12일 처형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살러시 페렌츠는 1897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헝가리 왕국 Kassa|커서hu(현재 슬로바키아코시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2][3][4] 그는 아르메니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신인의 혼혈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아르메니아계로 성씨는 살로시안(Salossian)이었다.[2][3][4] 그의 아르메니아 조상은 미하엘 1세 아파피 공작 통치 시기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Dumbrăveni|덤브러베니ro(Ebesfalva|에베스팔바hu)에 정착했다.

살러시의 할아버지는 1848년 헝가리 혁명에 honvéd|혼베드hu로 참여했으며, 출신의 독일 여성과 결혼했다. 이들의 아들이자 살러시의 아버지인 페렌츠 살러시 시니어(1866년 출생)는 커서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Honvédség|혼베데스hu(헝가리 방위군)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살러시의 형제들인 벨라, 카로이, 레즈 역시 군에서 복무했다.

살러시의 어머니 에르제베트 사크마르(1875년 출생)는 슬로바키아인과 루신인 혈통을 지녔으며 그리스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켰고, 살러시는 훗날 "나는 모유를 통해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신념의 힘을 받았다. 어머니는 나를 통해 믿음을 철저하게 마시게 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1944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5]

2. 2. 군 복무

살러시 페렌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을 걸었다. 고향인 커서(Kassa, 현재 슬로바키아 코시체)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후, 쾨세그, 마로스바사르헤이(현재 루마니아 터르구무레슈), 키슈마르톤의 군사 학교를 거쳐 비너 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군사 아카데미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15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입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교로 참전하여 약 36개월 동안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전쟁 말기에는 중위로 진급했으며, "Kaiserjäger|카이저예거de"로 알려진 티롤 소총 연대 제2연대에 소속되어 이탈리아 전선메라노와 가르다 호 근처에서 싸웠다. 이후 연대는 전쟁 막바지에 베르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전장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철관 훈장 3등급을 수훈했다. 헝가리로 돌아온 후, 1918년 11월 별 혁명 이후 잠시 외무부에서 통신 업무를 맡기도 했다.

전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헝가리 왕국이 수립된 후, 살러시는 새로 창설된 헝가리군에 합류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허이마셰르의 부사관 훈련 학교를 졸업하고 미슈콜츠의 제13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1923년에는 부다페스트의 루도비카 군사 아카데미에서 참모 장교 훈련 과정을 밟았으며, 뛰어난 성과를 인정받아 1924년 대위로 조기 진급했다. 1925년 4월부터는 헝가리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29년에는 데브레첸의 제11 보병 연대에서 소대장으로 야전 근무를 수행했다. 당시 부하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지휘관이었으며, 동료 장교들은 그의 군사적 능력과 문학적 소양을 인정했지만, 일부는 그가 지나치게 엄격하고 독단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33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부다페스트의 제1 훈베드 혼성 여단 참모장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점차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드러내며 트리아농 조약으로 잃어버린 옛 헝가리 영토의 회복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1935년 군에서 은퇴하였다.

2. 3. 정치 입문

1925년 4월부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살러시는 1930년 인종차별주의 성향의 비밀 결사인 헝가리 생활 동맹(Magyar Élet Szövetség)에 가입하여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귈러 궘뵈스 집권기 동안 정치에 매료되어 헝가리의 정치 문제에 대해 자주 강연했다. 이전까지 정치에 무관심했던 그는 열렬한 우익 민족주의자이자 '헝가리즘'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1920년 트리아농 조약 이전의 대 헝가리 국경 회복을 옹호했다.

1933년 소령으로 진급한 살러시는 자신의 견해를 요약한 46쪽 분량의 소책자 ''A magyar állam felépítésének terve|헝가리 국가 건설 계획hun''를 출판하여 여러 정치인들에게 보냈다. 군인의 정치 활동 금지 규정 위반으로 살러시는 20일간 구금되었고, 군사 법원에 의해 참모부에서 추방되었다. 석방 후 살러시는 에게르의 제14 보병 연대에 배속되어 참모 장교로 복무하다 제1 부관으로 근무했다. 점차 군대에 환멸을 느낀 살러시는 1934년 10월 사직을 요청했고, 1935년 3월 1일 군을 떠나 정치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3. 정치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헝가리군에서 복무하던 살러시 페렌츠는 1930년 인종차별주의 성향의 비밀 결사인 헝가리 생활 동맹(Magyar Élet Szövetséghu)에 가입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대 헝가리 건설을 주장하는 극단적 민족주의, 즉 "헝가리즘"의 강력한 신봉자였다.

1935년 군에서 은퇴한 살러시는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뛰어들어 국민의지당(Nemzet Akaratanak Pártjahu)을 창설했다. 이 정당은 과격한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세웠으나 여러 차례 선거에서 패배하고 정부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후 1939년 나치즘 성향의 화살십자당(Nyilaskeresztes Párt)을 설립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반정부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40년 아돌프 히틀러의 압력으로 석방된 살러시는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1944년 3월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헝가리로 돌아왔고, 같은 해 8월부터 독일의 지원 아래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4년 10월 살러시는 화살십자당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를 실각시키고 스스로 국민 지도자(Nemzetvezető|넴제트베제퇴hu)임을 선언하며 국민단결정부의 총리가 되어 헝가리의 권력을 장악했다.

3. 1. 파시즘 정당 창당과 투옥

1935년 중령 계급으로 군에서 은퇴한 살러시는 정치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그는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의지당(Nemzet Akaratanak Pártjahu)을 창설했다. 이 정당은 과격한 성향으로 인해 1937년 4월 헝가리 정부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살러시는 1937년 헝가리 국민사회주의당을 창설했으나, 이 정당 역시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살러시는 하층 계급의 민족주의적 불만과 반유대주의 정서에 호소하며 상당한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이후 살러시 추종자들의 활동이 더욱 과격해지자, 헝가리 정부는 파시즘 확산을 우려하여 그를 체포하고 투옥했다. 그러나 살러시는 투옥 중에도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여러 우익 단체가 연합하여 확대 개편된 화살십자당(Nyilaskeresztes Párthu)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939년 총선거에서 화살십자당은 30석을 획득하며 의회에 진출하여 헝가리의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텔레키 팔 총리는 화살십자당을 공식적으로 금지했고, 살러시는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가야 했다. 1940년 9월, 제2차 빈 중재 이후의 사면 조치와 아돌프 히틀러의 압력으로 살러시는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는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하게 되었고, 독일로 건너가기도 했다.

독일을 여행 중인 살러시와 기젤라

3. 2. 나치 독일과의 협력

1940년 아돌프 히틀러의 압력으로 석방된 살러시는 독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화살십자당텔레키 팔 총리에 의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살러시는 은밀히 활동해야 했다. 이 시기에 살러시는 나치 독일의 지지와 지원을 얻었는데, 독일은 이전에는 살러시의 헝가리 민족주의가 독일의 이익보다 헝가리의 영토 회복을 우선시한다고 보아 그를 경계했으나, 전쟁 상황 변화에 따라 입장을 바꾸었다.

1944년 3월 19일, 나치 독일은 동맹국인 헝가리가 연합국 측으로 돌아설 것을 우려하여 마르가레테 작전을 통해 헝가리를 점령했다. 이후 친독일 성향의 스토야이 되메가 총리로 임명되었고, 살러시는 헝가리로 돌아와 합법화된 화살십자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스토야이가 물러나고, 연합국과의 평화를 모색하던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가 다시 살러시의 체포를 명령하면서 살러시는 다시 헝가리 정부의 적이 되었다.

호르티는 헝가리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려 했으나, 독일은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독일은 호르티가 소련과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맺으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44년 10월 15일 판처파우스트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 과정에서 독일군은 호르티의 아들 미클로시 주니어를 납치하고, 살러시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아들을 살해하겠다고 호르티를 협박했다.

결국 호르티는 강압에 의해 10월 16일 섭정직에서 물러나고 살러시를 총리로 임명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는 사실상 화살십자당의 쿠데타에 "법적 승인"을 부여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호르티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기관총 앞에서 억지로 받아낸 서명은 법적 효력이 거의 없다"고 주장하며 당시 상황이 강압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6] 독일의 압력 하에 의회는 살러시를 국가 원수로 추대했다. 살러시는 국민통일정부를 수립하고 국민 지도자(Nemzetvezető|넴제트베제퇴hu)[18] 및 총리에 취임하여 헝가리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그의 통치권은 독일 점령 지역에 한정되었다. 그는 독일군에 철저히 협력하였으며,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화살십자당 당원들에 의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3. 3. 헝가리 장악과 국민통일정부

1944년 3월 마르가레테 작전으로 나치 독일헝가리를 점령한 후, 친독일 성향의 되메 스토이가 헝가리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화살십자당은 합법화되어 살러시는 당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8월 스토이가 물러나자, 살러시는 다시 헝가리 정부의 반대 세력이 되었고,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은 그의 체포를 명령했다. 당시 호르티는 헝가리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연합국과 접촉하며 추축국 동맹에서 이탈하려 시도했다. 독일은 호르티가 소련과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맺을 것을 우려하여 그를 실각시킬 계획을 세웠다.[6]

독일은 1944년 10월 15일 판처파우스트 작전을 실행하여 호르티의 아들 미클로시 주니어를 납치하고, 살러시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아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강압에 의해 호르티는 퇴위 문서에 서명하고 살러시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는 사실상 화살십자당의 쿠데타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태였다. 호르티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 서명이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6] 독일의 압력 하에 헝가리 의회는 살러시를 국가 원수로 임명했다.

1944년 10월 부다페스트의 살러시 페렌츠


살러시는 1944년 10월 16일, 호르티 섭정이 실각한 후 국민통일정부(Magyar Államhu)를 수립하고 '국민 지도자'(Nemzetvezetőhu)이자 총리가 되었다.[7] 이 정부는 헝가리 왕국나치 독일의 괴뢰국가로 전락시켰다. 11월 4일, 살러시는 공식적으로 국가 지도자로 취임했으며,[8] 베레그피 카로이, 페렌츠 러이니시(Ferenc Rajniss), 치어 샨도르(Csia Sándor)로 구성된 3인 섭정 평의회(Kormányzótanácshu) 창설을 포고했다. 그는 16명의 장관으로 내각을 구성했는데, 절반 가량이 화살십자당원이었다. 호르티 섭정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살러시 정권은 공식적으로 군주제를 폐지하지 않았고, 정부 문서에서는 여전히 국가를 헝가리 왕국(Magyar Királysághu)으로 지칭했으나, 헝가리(Magyarországhu)라는 명칭도 자주 사용되었다.[9][10]

살러시 페렌츠(중앙)가 이끄는 국민통일정부


살러시와 그의 정부는 나치 독일에 적극 협력했다. 그의 목표는 헝가리즘에 기반한 일당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나, 소련군의 침공 속에서 이를 실현할 능력이나 의지는 부족했고, 주로 독일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집중했다. 살러시 정권 하에서 호르티가 중단했던 유대인 추방이 재개되었고, 이른바 국제 게토가 조직되었다. 라울 발렌베리와 같은 일부 외교관들이 보호 여권을 발급하여 일부 유대인들을 보호하려 했으며, 살러시 정부는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는 독일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했다.[11] 또한 계엄령과 군사재판을 통해 정권에 반대하거나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간주된 인물들을 처형했다. 통치 기간 동안 가축, 기계, 산업 원자재 등 헝가리의 자산이 독일로 보내졌으며, 남은 헝가리군에 젊은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징집하여 붉은 군대와의 절망적인 전투에 투입했다.

살러시의 통치는 163일에 불과했다.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이미 붉은 군대는 헝가리 깊숙이 진격해 있었고, 그의 실질적인 통치력은 부다페스트를 포함한 중앙부의 좁은 지역에 국한되었다. 1944년 11월 19일, 살러시는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에게 포위되기 시작한 수도 부다페스트에 있었으나, 102일간의 부다페스트 포위전이 시작되기 전인 12월 9일 솜버트헤이로 도주했다. 이후 1945년 3월에는 비엔나 공세 직전 비엔나에 머물렀고, 나중에는 뮌헨으로 도피했다.[12]

4. 통치와 몰락

1944년 10월, 살러시는 화살십자당(Nyilaskeresztes Párt - Hungarista Mozgalom)의 지도자로서 스스로를 국가 지도자(Nemzetvezető|넴제트베제퇴hu)로 선언하고, 나치 독일의 지원 하에 국민단결정부(Magyar Állam)의 총리가 되었다. 이 정부는 헝가리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판처파우스트 작전으로 실각한 후 수립된 나치 독일의 괴뢰국가였다.[7] 헝가리 의회는 3인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Kormányzótanács|코르마니조타나치hu) 구성을 승인했으며, 11월 4일 살러시는 공식적으로 국가 지도자에 취임했다.[8] 그는 16명의 장관으로 정부를 구성했는데, 이 중 절반은 화살십자당원이었다. 살러시 정권은 헝가리 왕국(Magyar Királyság|머저르 키라이샤그hu)이라는 국명을 유지했지만, Magyarország|머저로르사그hu(헝가리)라는 명칭도 자주 사용되었다.[9][10]

살러시는 독일군에 철저히 협력하며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고 전시 총동원을 강행했다. 이는 하위 섹션 '유대인 학살과 전시 동원'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살러시 본인은 정치 사상 저술과 국내 시찰에 몰두했기 때문에, 실제 정무는 부총리 세레시 예뇌가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19]

그러나 살러시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이미 붉은 군대가 헝가리 영토 깊숙이 진격한 상태였고, 그의 통치는 163일에 불과했다. 그의 권한은 부다페스트를 포함한 일부 중부 지역에 국한되었다. 1944년 10월 29일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 공세를 시작하자, 살러시는 12월 9일 솜버트헤이로 도주했다. 이후 전황이 악화되자 1945년 3월에는 비엔나로, 빈 공세가 시작되자 다시 뮌헨으로 도주했다.[12][20]

1945년 5월 6일, 살러시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미군에 항복했고, 같은 해 10월 3일 헝가리로 송환되었다.[21] 1946년 2월, 부다페스트에서 전쟁 범죄와 반란 혐의로 인민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12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최후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패망과 최후'에서 다루어진다. 그의 매장지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며, 가명으로 매장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22]

4. 1. 유대인 학살과 전시 동원

살러시 페렌츠의 국민단결정부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가였으며, 살러시는 독일군에 철저히 협력하였다. 그의 정권은 호르티가 중단했던 유대인 추방을 나치 독일의 지원 하에 재개했다.[7] 살러시 정권은 독일과 협력하여 반유대 정책을 시행했으며, 국내에 거주하던 유대인 10만 명에서 15만 명을 살해하고, 8만 명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등 유대인 박해를 자행했다.[19] 또한 이른바 국제 게토를 조직하여 유대인들을 격리하기도 했다.[11] 당시 라울 발렌베리와 같은 일부 외교관들이 유대인들에게 보호 여권을 발급하여 추방을 막으려 했고, 독일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살러시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다.[11]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헝가리의 공업 및 농업 자원(가축, 기계, 마차, 산업 원자재 등)을 독일에 제공했으며, 노인과 소년들까지 헝가리군에 징집하여 붉은 군대와의 절망적인 전투에 투입했다.[19] 살러시의 통치는 붉은 군대가 이미 헝가리 깊숙이 진입한 상황에서 시작되었기에 163일에 불과했으며, 그의 권한은 부다페스트를 포함한 좁은 지역에 한정되었다.

4. 2. 패망과 최후



살러시의 국민단결정부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가였으며, 그의 통치 기간은 163일에 불과했다.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이미 소련군이 헝가리 영토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였고, 그의 권위는 부다페스트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다.[7] 살러시는 나치 독일에 적극 협력하며 호르티 미클로시가 중단했던 유대인 추방을 재개했고, 이른바 국제 게토를 조직했다. 이 시기 라울 발렌베리와 같은 일부 외교관들이 보호 여권을 발급하여 일부 유대인들을 구출하려 노력했지만[11], 살러시 정권 하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해되거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또한 계엄령과 군사재판을 통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국가의 주요 자원(가축, 기계, 원자재 등)을 독일에 넘겼으며, 노인과 소년까지 강제로 징집하여 붉은 군대와의 절망적인 전투에 투입했다. 정무의 대부분은 부총리 세레시 예뇌가 대행했다.[19]

1944년 11월 19일,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를 포위하기 시작하자(부다페스트 공세), 살러시는 12월 9일 도시를 버리고 솜버트헤이로 도주했다. 이후 전황이 계속 악화되자 1945년 3월에는 비엔나로 피신했고, 빈 공세가 시작되자 결국 뮌헨까지 도망쳤다.[12][20] 탈출 후 4월 29일, 오랫동안 교제했던 루츠 기젤라와 결혼했다. 그의 내각은 1945년 5월 7일, 독일 항복 하루 전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13]

살러시는 1945년 5월 6일 오스트리아 마트제 인근에서 미국 육군에게 체포되었고,[13] 같은 해 10월 3일 헝가리로 송환되었다.[21] 1946년 2월부터 부다페스트의 리스트 페렌츠 음악원에서 열린 인민 법정에서 전쟁 범죄와 반역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3월 12일, 부다페스트에서 그의 전직 장관이었던 버이너 가보르, 베레그피 카로이, 그리고 화살십자당의 주요 이념가였던 게라 요제프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처형은 오스트리아식 기둥 방식으로 집행되었는데, 이는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을 서서히 질식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었다. 살러시는 이 방식으로 인해 즉시 의식을 잃기보다는 질식으로 천천히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14] 처형 직전 가톨릭교회 사제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았다.[15]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들은 현재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과 부다페스트 도하니 거리 시나고그 내 유대인 박물관의 홀로코스트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다.[14]

살러시를 포함한 관련자들의 사면 요청은 1946년 3월 15일, 이미 처형이 집행된 이후에 틸디 졸탄 대통령에 의해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다.[16]

그의 시신은 부다페스트의 라코스케레슈투르 신공동묘지 298구역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역사가 코바치 토마시는 당국이 그의 신원을 숨기기 위해 "루카치 페렌츠"라는 가명으로 위장하여 매장했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역사가들은 명확한 문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17][22]

5. 유산 및 평가

살러시 페렌츠가 이끈 화살십자당 정권과 그의 짧은 통치는 헝가리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극단적인 민족주의파시즘 이념은 나치 독일과의 협력 및 홀로코스트 동조로 이어져 헝가리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6] 1945년 정권 붕괴 후 살러시는 전범으로 처형되었으며, 전후 헝가리에서는 그의 정권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역사적 청산 작업이 진행되었다. 오늘날 살러시의 행적은 극단주의와 전체주의가 초래하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5. 1. 한국의 관점

살러시 페렌츠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헝가리에서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을 이끌었던 극우 정치인이다. 그의 행적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 특히 일제강점기와 비교하여 여러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살러시는 1939년 나치즘의 영향을 받은 화살십자당을 창설하고 이끌면서 극단적인 민족주의반유대주의를 선동했다. 그는 1944년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6] 이는 외세의 힘을 빌려 자국의 합법 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찬탈한 행위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부 친일파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며 동족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려 했던 모습과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살러시가 이끈 국민단결정부는 나치 독일에 적극 협력하며 수많은 유대인롬인을 학살하고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데 앞장섰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헝가리에서는 극심한 공포 정치와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다. 이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념이 어떻게 파시즘적 폭력과 반인륜적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살러시와 같은 인물의 등장은 민주주의 체제가 약화되고 극단주의가 득세할 때 사회가 어떤 비극을 맞이할 수 있는지 경고한다.

1945년 연합군에 의해 그의 정권이 붕괴된 후, 살러시는 미군에 체포되어 헝가리로 송환되었다. 그는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헝가리 인민재판소에 기소되어 1946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그의 몰락은 외세에 의존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 결국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관점에서 살러시 페렌츠는 과거사 청산과 올바른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반면교사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의 사례는 극단적인 이념과 외세 의존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민주주의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되새기게 한다.

참조

[1] 서적 The Jews of Hungary: History, Culture, Psychology https://books.google[...]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twentieth-century political thought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Ferenc Szalasi http://hungarian-his[...] 2011-01-09
[4] 서적 Europe between the wars Pearson Education
[5] 웹사이트 Nemzetvesztő nemzetvezető http://www.historia.[...] 2013-10-29
[6] 서적 Admiral Nicholas Horthy Memoirs https://books.google[...] Simon Publications LLC
[7] 웹사이트 The Policies of Prime Minister Kallay and the German Occupation of Hungary in March 1944 http://hungarian-his[...] 2011-01-09
[8] 웹사이트 Hungary: Notes - archontology.org http://www.archontol[...]
[9] 간행물 Budapesti Közlöny 1944-10-17
[10] 간행물 Hivatalos Közlöny 1945-01-27
[11] 웹사이트 Prim Online http://www.nsz.prim.[...] 2011-07-18
[12] 문서 The Royal Hungarian Army in World war II
[13] 서적 A Magyar Honvédség a második világháborúban Európa Könyvkiadó
[14] 뉴스 Thirty-two frightening snapshots of a hanging. And no one knew who the victims were – until now. https://www.washingt[...] 2018-02-09
[15] 웹사이트 Hungarian Prime Minister Ferenc Szalasi is given the last rites before being hanged as a collaborator, 1946 https://rarehistoric[...] 2014-05-27
[16] 서적 A Szálasi-per Reform Lap- és Könyvkiadó Rt.
[17] 웹사이트 Nemzeti emlékhelyen nyugszik Szálasi? http://www.fn.hu/bel[...] 2008-02-08
[18] 문서
[19] 서적 A history of fascism, 1914-1945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 문서 The Royal Hungarian Army in World war II
[21] 서적 A Magyar Honvédség a második világháborúban Európa Könyvkiadó
[22] 웹사이트 Nemzeti emlékhelyen nyugszik Szálasi? http://www.fn.hu/bel[...] 2008-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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